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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cture

엇갈린 두 권의 책

by tuzeche 2017. 5. 25.


노승영이 옮긴 이 책의 원제목은 Field Notes on Democracy : Listening to Grasshoppers. 가히 '인도 민주주의의 묵시록'이라 부를 만한 책이다. 묵시록엔 도래할 신천지에 대한 예언이 있다고들 하는데, 이 책에는 그런 어설픈 희망의 예언조차 없어 음울하기 짝이 없다. 대신 책의 첫 장을 열면 하얀 백지 위에 이렇게 적혀 있다. "이성과 희망을 분리하는 법을 배운 이에게". 

읽어 가노라면 인도 현대사에서 벌어진 몇 가지 비극적인, 상징적이고 징후적인 사건들과 만날 수 있다. 인디라 간디 암살 후 벌어진 시크교도 학살(1984), 이슬람 사원 바브리 마스지드의 파괴(1992), 포크란 핵실험(1998), 인도 의회 테러 사건(2001), 구자라트 무슬림 대학살(2002)로 이어진 사바르마티 특급열차 화재 사건(2002), 인도의 카슈미르 군사 점령과 카슈미르인들의 봉기(2008), 뭄바이 연쇄 폭탄 테러 공격(2008) 등. 아룬다티 로이의 평론에 보이는 비범함 중 하나는 (인도의) 특수한 문제들을 어떤 보편성의 지평에서 다루고 사유할 줄 안다는 것이다. 이는 그녀의 평론들이 국적과 지역에 관계 없이 독자의 호응을 얻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도 그녀는 예의 저 테러와 학살들, 거기 담긴 광기와 부조리들을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1915)과 연결시킨다. "연합"과 "진보"도 그렇다. 이 두 개의 키워드를 매개로 인도의 정치 혹은 사회경제적 현실과 아르메니아인을 학살한 터키 정당 "연합진보위원회"가 만난다. 인도의 맥락에서 연합이란, 그녀는 이를 민족주의란 말로 풀었지만, 민주적 가치 따위에 아랑곳 않는, 인도 제도정치에 횡행하는 기괴한 일련의 연정들이고, 이 연정의 중심에 극우 힌두 민족주의 세력이 있다. "2000년 들어, RSS는 6만여 지부와 400만여 자원자를 통해 자신의 교리를 인도 전역에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전 총리 바지파이, 전 내무부 장관이자 야당 당수인 아드바니, 구자라트 주 총리를 세 차례 연임한 나렌드라 모디가 있습니다. 언론, 경찰, 군대, 정보기관, 사법부, 행정부 고위 관료 중에도 RSS의 이데올로기인 힌두뜨와를 비공식적으로 추종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RSS의 진짜 힘은 수십 년 동안의 노력 끝에 사회의 모든 차원에 걸친 조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어떤 정치적 문화적 집단도 이에 필적하지 못합니다."(본문 205~206) 나렌드라 모디는 2002년 구자라트에서 무슬림 대학살이 자행되던 당시 구자라트주 총리였고 인도 최대 기업인 릴라이언스와 타타 그룹 총수들이 머리 조아려 찬사를 보낸 '신자유주의적 진보'의 전도사로, 오늘날 마침내 인도 총리가 된 작자다. 그러니까 진보는 일반적 맥락에선 개발과 발전에 다름 아니며 탐욕과 착취의, 인도의 맥락에선 어쩌면 학살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는 인도의 결함 있는 민주주의가 파시즘을 키웠다고 말하면서 쓴다. "지난 몇 년간, 걸음마 단계이던 파시즘을 이만큼 키운 것은 인도의 수많은 '민주주의' 기구들이다. 의회, 언론, 경찰, 행정부, 대중 모두가 파시즘과 놀아났다."(본문 64)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이 그랬듯이, 인도에서도 학살에 가담하거나 부추겼던 이들 누구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승승장구했다. "죄를 묻지 않는 것은 인종 학살에 꼭 필요한 전제 조건입니다. 인도는 대량 학살자에게 관용을 베푸는 대단한 전통이 있습니다. 일일이 말씀드리자면 책 몇 권으로도 모자랄 겁니다."(본문 207) 그런데 학살이든 학살자에게 베푸는 관용이든, 이는 인간의 결함이나 일시적 일탈이 아니다. "인종 학살은 사랑과 예술과 농경 못지 않게 오래고 지속적이며 인간 조건의 크나큰 부분을 차지하는 습성입니다. 15세기부터 지금까지 저질러진 인종 학살의 대부분은 '레벤스라움'(lebensraum)을 찾으려는 유럽의 침략 과정에서 큰 몫을 했습니다."(본문 202) 바로 이 레벤스라움이 문제다. 인도 중산층과 상류층은 지금 그들만의 "하늘의 왕국"에서 그 레벤스라움을 더 넓히기 위해 하층 카스트와 무슬림들, 달리트와 토착부족민(adivasi)들과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그들은 이 "식충이들"을 인도 지도에서 아예 지워버리고 싶어한다. 근래 읽었던 <르몽드 디플로마틱>의 기사, 벵자맹 페르낭데즈가 쓴 "인도 언론 재벌의 낯 뜨거운 광고판촉"에서 본 장면 그대로다. 거기, 중상류층을 주 독자로 삼는 어느 영문 일간지 편집국장이 등장해 '두 개의 인도가 있다'고 하면서 지도를 그리곤 하층 카스트들, 게토에 갇힌 무슬림들, 달리트와 아디와시들의 인도를 지워버린다. 그리고 이 장면은 열 명의 무슬림 소년 테러범들이 벌인 2008년의 뭄바이 테러와 겹쳐진다. 채널 인디아 TV 앵커가 묻는다. "당신들은 포위되었소. 이제 죽은 목숨인데 왜 항복하지 않는 거요?" 돌아온 답이 이랬다고 한다. "우리는 매일 죽는다. 이렇게 죽느니 하루라도 사자처럼 사는 게 낫다."(본문 252)

국가 권력과 인도 정보기관의 정치공작에 희생당한 사람들이나 살해당한 무슬림들 이야기, 인도 경찰의 고문과 누명 쓴 사람들, 터무니 없는 인도 사법 권력과 그 스캔들에 관한 이야기를 겨우 헤치고 나와(이런 류의 이야기들을 결코 유쾌하게 읽을 수는 없으니까) 책을 덮으면, 아룬다티 로이가 던진 질문 한 마디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무엇으로 둔갑시킨 걸까?" 웬걸, 다름아닌 우리에게 묻고 있잖은가. 남의 일이 아니다. (이 리뷰를 작성한 때는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입니다. 참고하시길.)


아룬다티 로이의 책을 읽으면서 떠올린 다른 책 한 권. 예전에 일독했던 아마(르)티야 센의 The Argumentative Indian (이경남 옮김)이다.


"살아 있는 인도"로 이름을 바꿨지만, 원래 제목대로라면 '논쟁을 즐기는 인도인' 정도다. 이 책을 떠올린건 두 권의 책들이


절묘하게 만나면서도 인도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에서 양자가 대척점에 놓이고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아룬다티 로이와 아마르티아 센은 서로를 (아마도) 딱 한 번씩 인용 내지 언급한다. 물론 우호적으로, 하지만 짧게. 마주침은 짧고 둘 사이의 거리는 멀다. 로이의 어조가 처절하고 섬뜩하다면 센의 어조는 점잖고 한가롭다. "첫째, 민주주의의 실천은 만족해도 좋을 것 같다. 1967년에 "타임스"의 특파원은 ..... 인도에서 민주주의는 곧 끝장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가 예상한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때마다 조직적인 선거가 합리적 공정성을 유지했고, 전통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이렇게 덧붙이긴 한다. "인도 민주주의의 성과에 과오가 없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인도의 민주주의가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나 로이의 평론들에 비춰보면 인도의 이른바 '민주주의'는 심각한 위기로 내달리고 있는 만큼, 센의 이야긴 아무래도 나이브하게 들린다. 로이가 카슈미르와 구자라트에서 인도 군경과 폭도들에게 윤간당한 뒤 산채로 화형당한 무슬림 여성들을 이야기할 때, 센은 3장의 한 절에서 '인도 여성의 행복 찾기'를 얘기한다. 그 내용이나 포지션이 유엔(UN) 보고서를 영락없이 빼닮았다. 점잖지만 대개는 공허한. 특히나 더 괴이하고 지루했던 부분은 4장(인도 바로보기 - 여기서 "바로보기"를 또 보다니!)의 '인도, 인도인의 정체성과 미래'라는 글이었다. 이는 보아하니 도랍 타타(Dorab Tata) 기념 강연 원고였던 것 같은데, 이 인물은 타타 그룹을 만든 잠셋지 타타의 맏아들이었다. 센은 이 글에서 도랍 타타에게 "인도 산업계의 걸출한 지도자"이자 "훌륭한 박애주의자"라는 헌사를 바친다. 센의 이런 태도나 어조는 그 자신이 인도의 현실이나 절박한 삶의 현장에서 얼마나 멀찍이 물러서 있는지 말해준다. 그 거리 때문일까? 대중적 인문교양서로 본다면 나름 의미 있는 책이지만, 세계적 명사의 책이라 내심 기대하고 읽은 나로선 다소 실망스러운 책이었다. "인사이트 시리즈"라는 총서명이 무색할 정도로, 통찰이란 이름에 값하는 사유는 찾기 어려웠다. (나도 번역하는 자로서, 애써 번역하신 분에겐 좀 미안한 얘기다... 하지만 번역문 자체는 훌륭하다. 흠잡을 데가 거의 없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두 개의 키워드는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다. 저자는 인도의 역사와 전통을 거슬러오르며 인도인들이 예로부터 "논쟁하기 좋아하는", 혹은 논쟁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그 역사적 예로 아쇼카왕과 악바르 대제, 오래된 공개토론의 전통을 거론한다. 그것도 몇 번이고 거듭해서. 비로소 원제목이 와닿고, 번역서의 개작된 제목이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센이 왜 이 얘길 이런 식으로 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한다. 극우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자가당착을 드러내고 그 프로파간다 자체를 와해시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똑같은 사례들이 몇 번이고 반복될 뿐, 그 내용을 심화시키지 못한 것이 센의 한계이고 내 아쉬움이다.

그럼에도, 이 책의 미덕은 다른 데 있다. 아룬다티 로이는 "우리가 모르는 인도"에서 "인도가 단순한 근대국가가 아닌, 유서 깊은 문명에 속하기를 바랄 수는 없을까?"(64)라고 혼잣말 하듯 되뇌었는데, 센의 책이 바로 이 유서 깊은 문명과 문명의 교류(2장. 인도의 문화와 소통 - 지적 교류와 열린 문화)를 논하니, 이 대목이야말로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센의 미덕이다. 중국과 인도 문명의 교류나 아랍과 인도 문명의 혼종성은 정말이지 흥미로운 주제다. 이 얘기 때문에라도 이 책은 일독할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몇 가지. "살아 있는 인도" 중 '인도에 관한 서구적 시각의 세 가지 범주'를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이 세 범주를 옮긴이는 문예적(curatorial) 방법론과 권위주의적(magisterial) 방법론, 이국취향적(exoticist) 방법론이라 불렀다. 옮긴이도 고민했으리라 보이는데, 해당 본문 내용을 읽어봐도 차라리 그냥 큐레이터의 방법론, 치안판사 혹은 법관의 방법론, 이국취향자의 방법론(혹은 방법론이라기보단 시선)으로 옮기는 편이 나았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 편집상의 실수로 보이지만, 자이나교의 '두 개의 국가'이론(301쪽)이란 것은 없다. 영어 원문을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자이나교가 아니라 아마 무하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의 '진나'일 것이다. 진나와 '두 개의 국가'도 이 책에서 몇 번 거듭되는 얘기다. 역시 거듭 나오는 산스크리트 용어 '아카르야'는 '아짜리(/르)야'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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